이중섭 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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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중섭의 황소는 중고등학교 미술책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그림이자 한민족의 정서라고 배워왔다.

그보다 감명깊게 읽었던 이중섭의 일화가 생각나서 적어본다.

 

화가 이중섭과 그의 아내 이남덕 여사(마사코)는 첫째 아들은 생후 1년도 안 되어 디프테리아로 잃고 둘째(이태현, 1947년생, 2016년 후두암으로 별세), 셋째 아들(이태성, 1949년생) 이렇게 아들 셋을 두었다. 

 

이중섭의 가족은 공산 정권이 북한에 들어서면서, 수난을 당했는데, 북한 원산에 있는 삶의 터전을 모두 버리고, 흥남 철수에서 부산으로 와서 살았다. 1951년에는 제주도로 건너가 11개월간 가족과 함께 지냈는데, 이후에 부산 범일동 판자촌으로 돌아왔다.

 

1952년에 이남덕 여사의 아버지(장인)의 부고를 접하면서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냈는데, 이남덕 여사와 둘째 아들의 건강이 무척 나빠진 상태였기 때문이기도하며, 이중섭 화가 자신도 일본으로 건너가고 싶었지만, 그당시 한국과 일본은 국교단절이어서 가지 못했다.

 

1953년 7월에 시인 구상의 도움으로 대한해운공사 선원증을 얻어 단기체류 자격으로 일주일 동안 일본을 방문했는데, 이남덕 여사의 어머니(장모)는 이중섭이 항구에서 벗어나 가족들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히로카와 고젠(広川弘禅) 농림대신에게 부탁해서 신원보증서까지 구해주었다고 한다. 

 

이중섭과 이남덕여사 그리고 둘째아들과 셋째아들은 1주일 동안 히로시마의 한 숙소에서 지냈는데, 이 시간이 화가 이중섭이 가족과 함께 한 마지막 시간이었다.

 

첫째 아들을 잃고 크게 상심하며, 아들이 관 속에서도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발가벗은 채 뛰노는 어린아이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그림에 복숭아나 게처럼 동양화에서 장수나 복을 상징하는 사물이 많이 들어가 있는데, 복숭아는 죽은 아들이 천국에서 따다 먹으라고 천도복숭아를 그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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